Entre Suerte - 지구별 여행기
리마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 본문

페루에 온 지 한 달쯤 되었을까. 외국인 등록을 위해 인터폴을 방문했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남편 직장 법무팀의 현지 직원이 동행해 주어 회사 차를 타고 아침 일찍 네 식구가 함께 이동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등록 절차는 only you, 당사자 혼자서 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긴장이 몰려와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날도 나는 '스페인어 못해요(=제발 말 시키지 마)'라는 의미의 "No hablo Español."을 방패 삼아 눈치껏 치아 검사와 지문 등록을 마쳤다. 그리고 갑자기 들이댄 카메라 앞에서 어색함과 얼떨떨함이 뒤섞인 얼굴로 사진까지 찍었다.
그 순간, 낯선 이방인이라는 내 위치가 확연히 다가왔다.

이후 우리는 이민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달 앞서 외국인 등록증을 발급받은 남편 카드에서 오류가 발견되어 수정과 재발급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한참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니 인터폴보다 훨씬 더 다양한 모습의 외국인들이 보였다.
그런데 동양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더 많이 느꼈던 것 같다.
한국에 있을 때 내가 외국인을 바라보던 시선은 어땠을까.
내 눈빛과 제스처는 충분히 부드러웠을까.
짧은 영어 실력이 들통날까 두려워 무표정으로 가만히 있었을뿐 그들에 대한 거부는 아니었는데.
입장이 바뀌고 나서야 돌아보게 되는 것들이 참 많다.
다행히도 다민족 국가인 페루에서는 아직까지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경험한 적은 없다.
가끔 “치노(Chino)? 니하오~”라고 인사를 건네며 지나가는 사람을 만날 때면 솔직히 빈정이 상하기도 하지만, 누구든 외모만으로 국적을 정확히 알아보기는 힘들다는 점을 생각하면 흔한 오해 정도로 넘길 수 있는 수준이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순하고 늘 웃상인 페루 사람들인데다 동양인에 대한 이미지도 우호적이라 외출하다 보면 관심 섞인 시선을 느끼곤 한다.
특히 작년 ‘케데헌’ 열풍 이후에는 한국말로 대화하며 지나가는 우리 가족을 목이 꺾일 정도로 쳐다보거나,
뒤따라와서 한국말로 짧은 인사를 건넨 뒤 자기들끼리 신나서 호들갑을 떠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한 네일샵은 나에게 한국말을 몰라 더 좋은 서비스를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한 적이 있었으니, 몇 년 사이 달라진 한국의 위상이 새삼 놀랍다.
치열한 경쟁과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 각자의 생존 전투를 치르는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 덕분에, 그 작은 나라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에서까지 후광 효과를 누리고 있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사실 이곳에서 외국인 등록증은 단순한 신분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은행 계좌를 만들 때도, 병원을 이용할 때도, 여행을 가거나 각종 행정 절차를 진행할 때도 늘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카드다. 작년 말부터 이어진 페루의 정치 이슈로 치안과 행정이 다소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오히려 이 카드가 있어야 외국인으로서 신분을 명확히 증명하고 불필요한 문제를 피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작은 배려들도 있다.
공공기관에서 조금 더 천천히, 여러 번 설명을 해 주거나, 몇 마디 스페인어만 해도 “스페인어 잘 하네”라며 웃으며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때때론 이 낯선 친절 덕분에 타지 생활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기도 한다.
비록 몇 년 동안 잠시 머물다 가는 외국인이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순수한 호의와 관심을 소중히 여기며 지내고 싶다.
이 나라의 질서와 문화를 존중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는 외국인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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