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re Suerte - 지구별 여행기
페루 빠라가스 여행 기록 - 바다의 기억 위를 걷는 시간 본문

영화보다 더 압도적 스케일, 화성같은 사막 한 가운데에서.
생동감 넘치던 바예스타 섬을 뒤로하고, 다시 부두에서 브라질 가이드를 만났다.
그의 손짓을 따라 뛰는 듯, 걷는 듯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여행사와 관광객들이 흥정하느라 왁자지껄한 도로 한가운데, 회색 SUV 한 대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인파를 헤치고 가이드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바예스타스 섬에서 돌아오던 배 안에서 긴장이 풀려 나른해졌던 몸은,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소음 속에서 번쩍 깨어났다.
바다를 뒤로하고 달리기 시작하니 점차 소음과 풍경이 단순해졌다.
비포장 도로로 들어서자 차는 덜컹거리며 크게 흔들렸고, 그 순간 눈앞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모래와 하늘뿐인 세계. 사람보다 바람이 먼저 도착해 있을 것 같은 곳. 딱 영화 '마션’에서 보던, 화성 같은 풍경이었다.


역사 속 바다의 비밀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빠라가스 국립보호구역(Reserva Nacional de Paracas) 안에 있는 라 카테드랄(La Catedral) 전망대다.
이름 그대로 ‘대성당’이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원래 파도와 바람이 수천 년 동안 깎아 만든 거대한 바위 아치 지형이었다고 한다.
가이드는 안내문을 읽어주며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은 사막처럼 보이지만, 약 3천만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따뜻한 바다 아래였고 열대 식물까지 자라던 환경이었다는 것.

그리고 3,600만 년 전, 이 바닷속에 살던 작은 달팽이 ‘투리텔라(Turritella)’의 화석 이야기까지.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모래와 바위가 사실은 바다의 기억이라는 말이었다.
그 설명을 듣고 나니 바닥에 박혀 있던 암모나이트 같은 문양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과 함께 유심히 살펴보고 있자 가이드가 하얀 돌 조각을 하나 건네주었다.
소금 같기도 하고, 산호 같기도 한 질감. 맛을 보라기에 살짝 혀를 대보니 짠맛이 느껴졌고, 아이들은 금세 신이 났다.
이 모든 것이 바다 생물의 흔적이라니.
이곳이 왜 이렇게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차를 타고 더 큰 전망대로 이동했다.
지금의 ‘라 카테드랄’은 2017년 지진으로 일부가 무너져 예전처럼 바위 아치를 가까이서 볼 수는 없다고 한다.
(페루는 태평양 불의 고리 위에 있어 지진이 잦은 국가이기도 하다.)
지금은 멀리서 바라보는 전망대만 남아 있다. 광활한 대지 위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제대로 된 건물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특별하고 초현실적인 장소를 왜 적극적으로 관광 개발하지 않았을까 궁금해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현실적이었다.
이곳은 극건조 기후로 담수원이 거의 없고, 강한 바람과 염분이 섞인 토양 환경 때문에 시설을 짓고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
게다가 국립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개발 자체도 엄격히 제한된다고 했다. 그래서 이 풍경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쉽다는 생각보다 “이 정도여도 충분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까이서 소비하듯 보는 풍경이 아니라, 멀리서 시간을 상상하며 바라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바다를 보고, 사막을 걷고, 화석을 통해 이야기를 읽다 보니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지구의 아주 긴 시간을 압축해 놓은 공간처럼 느껴졌다.




바다 위에서 이어지는 또 다른 생계
전망대에서 이어진 계단을 따라 바다 앞으로 내려가 보았다.
평온해 보이던 바다는 생각보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잔잔한 수면 위에 떠 있는 작은 배들, 그 사이를 오가며 검은 더미를 쌓아 올리는 사람들.


가이드는 톳처럼 생긴 방울이 곳곳에 데롱데롱 달린 커다란 해조류를 보여주었다.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해조류(알가, Algas)를 채취하는 지역이었다.
빠라가스 해안에서 수확되는 해조류에는 ‘알지네이트(alginato)’라는 성분이 풍부한데, 이 성분은 화장품, 의약품, 아이스크림 등 다양한 산업에서 사용되는 가치 높은 원료라고 한다.
가이드는 봉투에 알가를 담으며 나에게도 가져가라 했지만, 나는 웃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
엽서같던 풍경, 현실적인 삶의 모습
다시 차를 타고 해수욕과 식사가 가능한 곳으로 이동했다.
정박해 있는 배들 앞에 내리니 주변은 식당과 해산물을 옮기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아이들에게 식사를 할지 물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이어진 일정에 지친 둘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나는 빨리 투어를 마치는게 나을 것 같아 가이드를 따라 큰아이와 함께 전망대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 다리가 아파질 즈음 도착한 곳. 그곳에는 마치 엽서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에메랄드빛 바다, 사막처럼 황량한 육지, 그리고 그 사이에 떠 있는 수십 척의 배들.
하지만 그 풍경 속에는 연출된 관광지가 아니라 이곳 사람들의 오래된 일상이 담겨 있었다.
빠라가스에서 잡히는 해산물은 전 세계로 수출되는데, 오징어는 동아시아로, 가리비와 조개류는 미국과 유럽으로 향한다고 한다. 이 바다는 그저 ‘예쁜 바다’가 아니라 지금도 누군가의 생계를 품고 있는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사진을 찍으려 할 때마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마치 “눈으로 담고 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가이드와 함께 인증샷 명소에 들렀다.
남들 찍는걸 눈으로 볼땐 쉬워보였는데, 막상 절벽 끝에 서니 바람이 거세고 균형 잡기가 어려웠지만
누워서까지 사진을 찍어준 가이드 덕분에 웃으며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빠라가스는 한 장면으로 끝나는 여행지가 아니다.
바다에서 사막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시선이 계속 이동하는 곳.
그래서인지 이곳을 떠난 뒤에도 사진보다 안내판에 적혀 있던 문장이 더 오래 남는다.
- 이곳은 한때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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